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화창하고 따스한 날 추위에 갇혀지내던 지루했던 집을 어머니 모시고 나섭니다.
딱히 가고픈 곳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서고 봅니다.
동네어귀를 벗어나며 신륵사가 떠오릅니다.
20여년이 넘도록 찾지 않았던 신륵사.
중학교 3학년때 처음으로 소풍가서 본 신륵사.
당시 주지스님이 저희 모교의 선배님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나네요.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합니다.
시원스럽게 고속도로를 달리지만.... 안개가 걷히지 않아 날씨는 그렇네요. ㅠㅠ
신륵사에 도착하여 보니 어수선하고 썰렁하고..... 조금은 실망이네요.
극락보전은 중창하느냐 흔적도 없고... 경내는 온통 불사중이라 복잡하네요.
일주문이 보입니다.
일주문 앞에는 원호장군 공적비가 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세심정이있습니다.
마음을 씻을 물은 흐르지 않네요.
왼쪽 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아보렵니다.
명부전
명부전 내부
600년 된 향나무
부도
조사전: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나옹,무학, 세 화상의 덕과 법력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모신곳
조사전 내부
솔밭 계단을 따라 올라갑니다.
솔밭도 간벌 작업이 한창이더군요.
솔밭 한가운데 석종과 석등이 있습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 보물 228호 나옹의 사리탑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 석등: 보물 231호 "석종부도를 장엄하기위한 공양구"
기단과 상부는 화강암인데.... 화사석은 대리석입니다.
세밀한 조각을 위해 대리석을 사용했나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반질반질 손 때가 묻고 달았네요.
그냥 눈으로 만 보면 안되나요....?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2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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