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이 청악산우회 이끌어온 김종선씨
알피니스트 비망록
글 곽정혜 기자 사진 신희수 기자·김종선 제공

▲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맑은 뫼’의 외길을 따라 걸어온 김종선씨. 그는 앞으로도 이 외길만을 걸을 생각이다.
최근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영화 <변호인>. 전직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흥행으로 엉뚱한 이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 비정상적인 시절을 진두지휘했던 인물. 당시의 만행에 대한 어떤 역사적 심판도 받지 않은 채 최근 다시 요직에 등용된 역전의 용사. 그가 남긴 한 마디는 아직도 여러 사람의 입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이다.
“우리가 남이가.”
이 말이 나온 배경과 이후의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사건들을 배제하고, 말 자체만 놓고 볼 때 이보다 인정 넘치고 따뜻한 말이 또 없다. 각박하고 몰인정한 세상 속에서도 기댈 곳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한줌 빛과도 같지 않은가 말이다. 슬프게도 혈연·학연·지연에 의지한 ‘감성팔이’는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통하는 레퍼토리고, 특히 산악회 같이 특수한 조직에서는 그 이상의 끈끈한 정(情)이 요구되기도 한다.
기자 또한 대학산악부 시절 선배들로부터 이 말을 밥 먹듯 들으며 강제 가족인증을 받았기 때문에, 산악부원들이 남이 아니라 가족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창립된 지 오래된 산악회나 한 산악회에 오래 몸을 담아온 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빙벽등반을 잘 하기로 소문난 청악산우회(淸岳山友會·이하 청악)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하는 단체 중 하나다. 청악의 회원들은 곧잘 “아버지 같은 김종선 선배, 어머니 같은 장기활 선배가 이끄는 모임”이라며 두 선배에 대해 애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번 달 알피니스트 비망록의 주인공으로 ‘청악의 아버지’를 만나보기로 했다.
청악과 함께 시작했지만 창립멤버는 아냐
주변 산악인들에게 알아본 결과, 많은 이들이 김종선(62세)씨가 청악 창립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청악의 회원조차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창립 멤버는 아니라고 말했다.
“중앙대학교 70학번인데, 산악부 동아리에는 안 들어갔어요. 대신 학교 친구였던 장기활, 박상국과 당시 을지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서원교, 황인규 등과 어울려 산에 다녔죠. 이 친구들이 주축이 돼서 71년에 청악산우회를 만들었는데 당시 나는 회원이 아니었어요.”
그의 첫 산행은 1971년 초겨울의 치악산 종주였다. 그를 포함한 5명의 무리가 청량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신림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주위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상원사를 향해 야간산행을 하던 중 만난 민가의 주인이 “위험하니 여기서 묵고 가라”고 권해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단다. 다음날 향로봉을 거쳐 내려가는 길에는 원주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소녀를 만나기도 했다. 첫 산행에서 순박하고 깨끗한 산의 모습에 반해 이후에도 몇 번 산을 찾았지만,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은 못한 채 휴학과 군 문제로 흐지부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김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친구들을 재회한 1976년에야 뒤늦게 청악에 가입하게 된다. 그때부터 이듬해인 77년에는 장기활씨와 함께 미친 듯이 산을 다니며, 설악과 도봉을 비롯한 전국의 산을 집보다도 많이 드나들었다. 당시 그들은 부족한 산행자금을 메우기 위해 체력단련을 핑계로 도봉산에서 지게 짐을 져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관음사까지 연탄과 시멘트를 나르는가 하면, 목재를 지고 천축사로, 배추와 시금치를 지고 석굴암으로, 연등을 지고 천은사로 다녔다. 초파일이나 식목일이면 벌이가 더 좋았다.
또한 당시 청악에는 산 정상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독특한 관행이 있었는데, 추운 겨울날 소백산 비로봉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한답시고 털모자를 벗고 노래를 불렀다가 한쪽 귀가 퉁퉁 부어오르고 물집이 잡히는 등 요즘말로 ‘웃픈(웃기지만 슬픈)’ 해프닝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때의 추억들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청춘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 2008년 캐나디안 로키 밴프 국립공원의 폴라써커스 빙폭 상단의 설벽을 등반하고 있다.
선배는 후배들의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
이후로도 그는 수년간 주축이 되어 산악회를 이끌었지만, 80년대 초반 무렵 기존 멤버들과의 갈등으로 고비를 맞게 된다. 산을 대하는 사고방식이라든가 모임을 이끌어가는 분위기 등 청악 창립 당시부터 기존 회원들과 맞지 않는다고 여겼던 부분이 결국 곪아 터진 것이다. 이로 인해 창립 멤버 대부분이 탈퇴를 하고 제대로 활동도 못하며 산악회가 반토막 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선후배 할 것 없이 모두가 서로에게 회의와 식상함을 느끼고 반목하면서 산악회가 존폐의 기로에까지 가게 됐어요. 누구의 잘못이 있었던 게 아니라, 회원 모두의 인내심이 부족했던 거였겠지요.”
당시 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회지(會誌)인 <맑은 뫼>를 통해 “전 회원이 일심단결하여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자”며 “열과 성을 갖고 이전보다 좀 더 난이도 높은 등반을 추구하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다행이라면 그렇게 제살깎기의 공전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산악회에는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와 생채기를 메우며 재기를 꿈꿀 수 있게 된 것. 그중 원종민(코오롱등산학교 부장), 남동건(현 프랑스 거주)씨 등이 청악산우회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산악계에서 아주 유명한 일화다.
“1980년대에 제가 충무로에서 패스트푸드점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종민이와 동건이가 우리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죠. 쉬는 날이면 이 친구들을 산에 데리고 갔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청악에도 입회를 시켰지요.”
2년여에 가까운 진통을 끝낸 1985년 겨울, 청악은 새로운 비상을 시작하기 위해 더욱 단단히 고삐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과제로 토왕성폭포를 겨냥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토왕폭을 등반한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라, 회원들은 사전에 한달간 강촌 구곡폭포에서 합숙을 하기도 했다.
“빙벽에 매달려 등반만 했던 게 다가 아닙니다. 바르트 훅을 개선 한다던가, 손목걸이 끈을 꽈배기처럼 꼬아 사용하는 등 빙벽장비에 대한 연구를 더 많이 했어요.”
31일간 전 회원 등반회수 187회, 50회 이상 등반자 2명. 구곡폭 길이를 50m로 치고 계산했을 때 당시 회원들의 총 등반거리는 9350m에 이르는 대기록이다. 처음 2인 1조로 훈련할 때 3시간이 소요되던 등반시간도 한달 후에는 한 시간 이내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준비된 도전자 현명식, 원종민, 김운회, 김석근씨는 1986년 2월 대망의 설악으로 향해, 2월 6일에 현명식·원종민 조가, 일주일 후인 2월 13일에 김운회·김석근 조가 토왕폭을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이 등반으로 전환기를 맞은 청악은 88년 소승폭 초등(김운회·이합승), 89년 소토왕폭 초등(김운회·조금석)에 이어 90년에는 5개조 10명이 토왕폭을 동시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또한 도봉산 선인봉 청악길(5.11a/b) 개척, 설악산 소토왕골 암장 개척 및 토왕폭/장군봉 하강루트 개척 등으로 이름을 알리며 대한민국산악상 개척등반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 2011년 청악산우회 40주년 기념으로 떠난 로터스플라워타워 원정의 전진기지인 Finlayson Lake Float Base에서 후배들과 함께(제일 오른쪽).
김종선씨는 이러한 과정에서 등반의 선봉에 나서 회원들을 이끌지는 않았지만, 거의 모든 등반에 빠지지 않고 함께 했다. 그 과정에서 차를 이용해 후배들을 픽업한다든가, 식사를 준비한다든가, 사진촬영을 도맡아 하며 후배들이 불편함 없이 등반하도록 도왔다.
“내가 욕심 부려 후배들 사이에 껴서 등반하면 민폐밖에 더 끼치겠어요?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이 제 기량을 더 발휘하도록 사다리가 되어주는 게 선배로서의 도리지요.”

▲ 김씨는 “원활한 등반을 위해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선배가 그 몫을 해야 한다”며
내 영혼의 안식처, 로키마운틴
산악회가 차츰 자리를 잡고 안정되어가자 그도 해외의 산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국내산악계에서는 알프스 등지나 히말라야 고산을 가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캐나다 지역에 ‘꽂혔다’고 했다. 그래서 1992년 2월, 윤용문·조금석·김운회씨 등과 함께 로키 산군 대빙폭으로 등반을 나서, 시즌 초등으로 위핑필라(weeping Pillar) 와 폴라써커스(Polar Circus)를 올랐다.
“로키를 다녀오니 우리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는 이토록 재미있고 새로운 등반대상지가 널렸는데, 왜 우리나라만 유독 히말라야와 알프스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했죠. 그 때문인지 지금껏 그쪽은 가보지도 못했네요.”
첫 해외등반은 그의 눈을 여러모로 트이게 만들었다. 특히 당시 우리나라 빙벽 그레이드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때였는데, 이때 구해온 미주 지역의 전문등반지를 번역해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 93년 부가부 이스트스파이어 정상에 선 김종선씨.
이듬해인 93년 여름에는 나름의 정예멤버를 모아 캐나다 로키 지역의 빅월 등반에 나섰다. 그들의 계획은 에디카벨 북벽 및 부가부산군 암벽 그리고 요세미티였다. 김종선·엄완용·부근호·조금석으로 이루어진 4인조는 왕복 18시간 안에 에디카벨을 등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며칠째 내리는 폭설로 베이스캠프에서 일주일을 대기했다가, 적당히 크러스트가 되었을 즈음에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밑에서 봤을 때는 할 만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벽에 가보니 암·설빙 구간이 너무 길더라고요. 하루 만에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텐트와 침낭은 둔 채 최소한의 장비만 가지고 갔다가 자칫하면 선등자가 조난되는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대원들은 무사히 등반을 마쳤고, 예상보다 2배 가까이 긴 30시간 만에 베이스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체력을 소진한 탓에 일주일 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고. 이후 기운을 회복한 그들은 부가부 산군으로 이동해 이스트 스파이어를 멋지게 등반했다. 이때에도 김종선씨는 본인의 욕심을 접고, 벽 아래까지 후배들의 장비를 운반해주고 반대편 벽에서 후배들을 기다렸다가 다시 짐을 받아주는 등 셰르파를 자청했다.
“원활한 등반을 위해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후배가 아니라 선배가 그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악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정신이 지금의 청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이때를 시점으로 그는 매년 캐나다로 떠나, 4~50일 동안 차를 타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등반도 하고 캠핑도 즐긴다. 20년 동안 줄기차게 다니다보니 현지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각 지역의 등반대상지도 훤히 꿰고 있다. 그래서 지난 2011년 청악산우회 창립 40주년 기념등반인 로터스플라워 타워 등반 당시에도 현지 행정을 도맡아 했다.
“요즘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 캐나다 여행을 할 때 마음이 더 편안합니다. 이제 그곳은 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에요.”

▲ 함백산에서 맞은 아침. 김씨는 15인승 승합차를 개조해 합판으로 벙커를 만들어 침낭부터 버너, 물, 쌀, 라면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간을 싣고
여전히 낭만을 꿈꾸는 노년의 ‘허클베리 핀’
이 시점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우선 이렇게 매년 등반여행을 다니면서 가족들의 이해를 어떻게 구하는지? 뜻밖에도 그는 아직 미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결혼의 필요성을 못 느꼈으며, 나이를 먹을수록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두 번째는 금전적인 문제다. 그는 92년 캐나다 원정 당시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취직이란 걸 하지 않았다. 돈은 연간 몇 차례 외주 일거리를 받아 처리해주고 일년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적게 버는 대신 적게 쓰면 생활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어요. 아등바등 돈을 벌던 때보다 여행을 즐기며 안빈낙도하는 지금의 삶이 훨씬 행복합니다.”
김씨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특히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로는 그도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쏘다닐 그가 아니다. 15인승 승합차를 개조해 어머니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만들고, 합판으로 만든 벙커에 침낭부터 버너, 물, 쌀, 라면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간을 싣고 틈날 때마다 전국유람을 다니고 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꼭 어머니를 모시고 다닌다는 그는 “그 연세에 우리 어머니만큼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젊은 시절부터 여행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 대상지 중 유난히 산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 산악인이라는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아요. 이제 힘든 등반을 하긴 힘드니, 앞으로는 트레킹이나 캠핑을 더 많이 즐길 생각입니다. 물론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청악 후배들의 뒷바라지도 계속 할 거고요.”
이제 청악은 그에게 단순히 몸담았던 산악회의 의미를 넘어 ‘또 하나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정작 부모가 되어 본 적은 없으나, 누구보다 부모의 마음을 잘 알고 또한 세상 어느 부모보다 깊고 넓은 사랑으로 후배들을 대해온 김종선씨. 기자를 만난 며칠 뒤에도 그는 자신의 애마에 어머니를 모시고 ‘맑은 뫼’의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판대 빙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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